Tuesday, November 5, 2013

책 품은 갤러리, 텅 빈 헌책방… 두 공간의 역할 교대: 우순옥 'your ground park' 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11/h2013110422115986330.htm
Nov. 2013
Seoul
등을 맞대고 있는 갤러리와 서점이 서로 역할을 바꿨다. 
텅 빈 철제 선반이 작품이 된 곳은 동네 책방 가가린이다.


그 많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촌 주민들의 사랑방인 서점 가가린이 텅 비었다. 
남은 건 새하얀 철제 선반과 책을 실어 나르던 철제 카트뿐. 
텅 빈 공간의 표정은 허전해 보이기도, 홀가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책들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가가린 뒤에는 온그라운드 갤러리가 붙어 있다. 
크기로 따지면 가가린이 갤러리에 붙어 있는 격인데, 책은 모조리 이곳에 옮겨져 있다. 
올해 5월 건축가 조병수씨는 일본식 가옥을 개축해 갤러리를 열면서 서점과 갤러리 사이의 벽돌담을 허물었다. 갤러리와 서점이 뒤바뀐 지난달 11일부터 가가린 직원들은 온그라운드 갤러리에서 근무 중이다. 

"비일상적 공간인 갤러리에 일상적 장소인 서점을 끼워 넣고 싶었어요. 
텅 빈 서점이 주는 생경함, 갤러리 안에서 판매 행위가 이뤄진다는 것에 대한 낯설음. 
이런 것들을 통해 당연한 듯 자리 잡았던 삶의 패러다임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기상천외한 장소 전환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우순옥 작가다. 
그의 눈에 띈 것은 갤러리에 쌓인 시간의 켜. 
조병수 건축가는 기존 가옥의 목재 프레임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 안에 백색 상자를 끼워 넣는 식으로 개축을 끝냈다. 
덕분에 살아남은 지붕과 기둥에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이는 새하얀 현대식 벽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쌓임'은 가가린에서도 발견됐다. 
층층 선반에 빼곡히 쌓인 책들, 책 안의 수많은 켜, 헌 책이 품고 있는 축적된 시간들. 
갤러리 지붕의 듬성듬성한 널판을 통과한 햇볕이 벽에 그려내는 빛의 레이어가 서점의 선반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작가는 두 공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9월 말 처음 온그라운드 갤러리를 방문해 양쪽 공간의 허락을 받아 전시를 확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사흘 내외. 
자연광과 전시작이 어우러져 또 다른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믿는 온그라운드 갤러리는 빛의 선반 위에 책들이 놓이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 가가린도 책들이 갤러리로 옮겨져 작품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갤러리에서 펼쳐 보는 책은 또 다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가가린은 헌 책과 예술 서적, 10부 내외로 찍히는 독립 출판물들을 주로 취급한다. 
주인이 없거나 주인이 있더라도 목소리가 작은 이들의 책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채유수씨가 펴낸 '수업 시간에 잠을 자는 15가지 창의적 방법들'같은, 제도권이 그 필요성을 주장해주지 않는 책들이 갤러리에 작품으로 놓인 모습은 묘한 승리감을 자아낸다. 

책들을 털어내고 공간의 주인공이 된 가가린의 선반은 미술 오브제로 부족함이 없다. 
철이라는 소재의 물성이 주는 쾌감, 미니멀한 아름다움, 말이 필요 없는 기능성.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공간에 들어선 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사유를 허락 받는다. 

가가린의 책들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13일. 
그 전에 가면 "전시가 좋아 매일 나와 있는다"는 작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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